庾美花的美篇

庾美花

<p class="ql-block">복도에서 다시 숨을 쉬다/ 유미화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제 나는 최종 진단을 받기 위해 청도 인민병원을 찾았다.</p><p class="ql-block">아침 햇살은 아직 서늘했다. 병원 앞길은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누군가는 진료 예약 시간을 확인하며 서둘러 걸었고, 누군가는 보호자의 팔을 붙잡은 채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였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소독약 냄새와 찬 바람이 함께 밀려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의료기기의 기계음과 대기표를 부르는 안내음, 낮게 오가는 말소리가 한데 섞여 귓가를 감쌌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들이 그날따라 또렷했다. 내 발걸음도 모르는 사이 느려지고 있었다.</p><p class="ql-block">이번이 세 번째 검사였다. 앞선 두 번의 검사에서 의사들은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는 말만 남겼다. 그때마다 나는 희망과 불안 사이를 오가며 결과를 기다렸다. 오늘만큼은 분명해질 터였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일이 늘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모르는 채 기다리는 시간보다 알아야 하는 순간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p><p class="ql-block">예약한 진료과를 찾아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혈액 검사와 영상 검사를 차례로 마쳤다. 바늘이 살갗을 찌르는 순간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검사실 앞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고, 누군가는 검사 결과지를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저마다 어떤 사연을 품고 이곳에 왔을까. 이 복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두려움 하나씩을 가슴에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p><p class="ql-block">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놓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p><p class="ql-block">‘괜찮을 거야.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p><p class="ql-block">그러나 마음을 달랠수록 불안은 더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p><p class="ql-block">마침내 진료실 문이 열렸다. 의사는 안경을 조금 내려 쓴 채 검사 결과지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그의 입보다 손끝을 보았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잠시 후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결과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의사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변의 소리가 일시에 멀어지고 눈앞에는 그의 얼굴만 남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p><p class="ql-block">얼마나 지났을까. 의사는 결과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p><p class="ql-block">“악성은 아닙니다. 하지만 종양의 크기가 예상보다 큽니다. 수술은 반드시 받으셔야겠습니다.”</p><p class="ql-block">악성이 아니라는 말에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수술’이라는 두 글자가 또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입원은 언제 해야 하나. 가족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미뤄 둔 원고와 약속은 어찌할까.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p><p class="ql-block">진료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다시 몸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오갔다. 누군가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고, 누군가는 검사 결과지를 움켜쥔 채 서둘러 걸어갔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나만 그 자리에 멈춰 선 것 같았다.</p><p class="ql-block">문득 오래전 기억이 밀려왔다. 첫 번째 암 수술을 받았을 때, 나는 병실 창가에 앉아 아침 죽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고 한참 창밖을 보았다. 면회 시간이 끝나고 가족의 등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던 일, 간호사가 링거를 바꾸며 “괜찮아요”라고 말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도, 가족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도 당연하지 않았다. 그제야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알았다. 두 번째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는 다행히 악성이 아니었다.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병원과 조금 멀어져도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니.</p><p class="ql-block">나는 병원 복도에 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암과 멀어지려 애쓰는데, 나는 어째서 이 이름과 이토록 자주 마주치는 걸까. 이번에도 암은 아니라고 하는데, 마음은 아직 그 이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번 깊이 새겨진 두려움은 병이 떠난 자리에도 오래 머무는 모양이었다.</p><p class="ql-block">암은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불청객 같았다. 문을 닫아도 어느새 문밖에 서 있고, 잊으려 하면 슬그머니 어깨를 두드리는 그림자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병보다 병에 대한 두려움과 더 오래 싸워 왔는지도 모른다.</p><p class="ql-block">눈을 감자 세 번째 수술이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짓이 위협인지, 고통을 끝내기 위한 또 하나의 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p><p class="ql-block">‘암 친구여, 그대는 나와 손잡지 마라.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p><p class="ql-block">생각해 보면 참 얄궂은 인연이다. 친구라면 반갑게 맞아야겠지만 이 친구만큼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남은 날들까지 어둡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p><p class="ql-block">나는 아직 쓰고 싶은 글이 많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가 보고 싶은 곳도 있다. 병실이 아니라 식탁에서 가족과 마주 앉아 웃으며 저녁을 먹고 싶고, 원고 마감을 핑계로 미뤄 둔 산책도 다시 하고 싶다. 계절이 바뀌면 꽃이 피는 모습을 바라보고, 가을이 오면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용기가 움트기 시작했다.</p><p class="ql-block">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무사히 눈을 뜨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저녁이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내는 그 평범한 순간들이야말로 삶이 건네는 가장 귀한 선물인지도 모른다.</p><p class="ql-block">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끝 창문으로 다가가 유리창에 손끝을 대 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창밖에서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으면서도 나무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나무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가 꺾이는 날도 있고 잎을 모두 떨구는 계절도 있지만, 뿌리가 살아 있는 한 다시 봄을 맞이하지 않는가.</p><p class="ql-block">나 역시 그럴 것이다.</p><p class="ql-block">세 번째 수술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앞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다시 일어서는 마음이라는 것을. 첫 번째 수술을 견뎌 낸 나도, 두 번째 수술을 이겨 낸 나도 바로 그 마음으로 오늘까지 걸어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걸어가리라.</p><p class="ql-block">나는 다시 복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진료실로 들어갈 때만 해도 이 복도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같은 복도, 같은 사람들, 같은 발소리였지만 내 마음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병원 복도는 참 묘한 곳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절망을 만나고 누군가는 희망을 얻는다. 또 누군가는 두려움을 안고 들어왔다가 살아갈 이유 하나를 품고 돌아간다.</p><p class="ql-block">창밖으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었다. 나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차갑게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고,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 때문에 오늘의 햇살마저 놓치고 싶지 않았다.</p><p class="ql-block">복도 끝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깊이 숨을 쉬었다.</p><p class="ql-block">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고맙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