庾美花的美篇

庾美花

<p class="ql-block">수필:간 맞추면 산다/ 유미화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봄 햇살이 창가에 늘어선 화분들 사이로 스며들 때 나는 흐릿한 아침잠에서 깨어 은은한 된장 냄새를 맡았다. 아,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니푸른 앞치마를 두른 그가 나를 보며 활짝 웃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일어났어? 아직 좀 졸리지? 곧 아침 다 돼.”</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퇴직 후 우리 집 주방은 완전히 그의 영역이 되었다. 젊었을 때 그는 “밖에 나가면 사고뭉치 집에 들어오면 미운이 또 두 끼”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하다 문턱을 넘으며 “나 오늘 아침 뭐 먹었지?” 하고 되묻곤 했고 저녁이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배고픈데 먹고 싶은 생각은 안 나”라는 모순된 투정을 늘어놓았다. 그 시절 식탁은 늘 전쟁터였다. 피곤과 조급함이 국물보다 먼저 식탁에 올랐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런 그가 이제는 새벽 여섯 시면 자연스레 눈을 뜨고 시장에서 고른 재료를 손질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주방은 그의 ‘음식 연구소’가 되었다. 노트북에는 각종 레시피와 요리 영상이 빼곡하고 양념 비율은 실험처럼 정밀하다. 친구들은 말한다. “이제 주방에서 해방됐겠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해방은커녕 오히려 더 자주 불려 다닌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여보, 이 된장찌개 맛 좀 봐. 오늘 된장 새로 장만했거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숟가락을 내민다. 한 입 떠먹자 구수함 속에 은근한 단맛이 따라온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괜찮지? 싱거우면 조림이랑 같이 먹고 짜면 조금만 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이미 내 다음 수저까지 계산해 두고 있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득 생각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을까. 퇴직하던 날 그는 허전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였다. 평생 일을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시간’이라는 선물은 오히려 버거웠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가 저녁 한번 해볼까?”</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게 시작이었다. 간이 들쑥날쑥한 된장찌개와 조금 탄 제육볶음. 하지만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웃었고 식탁 위에서 말이 오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요리하는 동안 흘러나오는 대화와 웃음 집 안을 채우는 냄새 속에서 하루가 유영하듯 흘러간다. 그는 요리 중간중간 자신의 철학을 덧붙인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음식도 사람 관계랑 똑같아. 간 맞추려면 서로를 알아야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나는 옆에서 채소를 썰거나 설거지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은 “당신, 정말 내 남편 맞아?” 하고 웃으면 그는 “퇴직하고 나니 내 안의 미식가가 깨어났어”라며 받아친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젊은 시절 우리에게 이런 시간은 없었다. 그는 회사에 나는 아이들과 집안일에 매달려 살았다. 아이들이 컸을 때조차 가족 식사는 각자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무언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만 마주한 식탁에서 우리는 다시 연인이 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시장에서 본 노점 아저씨 이야기부터 옛 여행지의 음식 이야기까지.</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느 날 그는 김치전을 부치다 김치가 덜 시다는 걸 알아챘다. 잠시 고민하더니 설탕을 아주 조금 참기름을 둘러 구웠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실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별미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맞추고 있는 ‘간’은 요리의 양념만이 아니라는 것을. 삶의 간, 관계의 간, 서로의 속도와 기다림을 조율하는 일이라는 것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퇴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조화의 시작이었다. 나는 책을 읽고 그는 조용히 커피를 내려 둔다. 그가 정원에 몰두하면 나는 시든 꽃잎을 정리한다. 때로는 내가 크레페를 굽겠다고 나서고 그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사 온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요즘 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다음엔 뭐 해 먹을까?”이다. 세계 지도가 식탁 위에 펼쳐진다. 실패도 있지만 그마저 웃음이 된다. 너무 짜진 찌개를 보며 “이건 밥 반 공기 각이네” 하고 놀리면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어느 저녁 발코니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불을 끈 채 식사를 했다.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아래 그가 만든 파스타를 먹으며 말없이 별을 올려다봤다. 젊은 날에는 이렇게 멈춰 설 여유조차 없었구나 싶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간 맞추면 산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옛말은 참 정확하다. 음식의 간뿐 아니라 삶의 간 사랑의 간을 맞추며 우리는 비로소 동반자가 되어 간다. 주방에서 냄비 뚜껑 소리와 그의 옛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등을 안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고마워. 오늘도 맛있는 하루를 만들어 줘서.”</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는 대답 대신 내 입가에 묻은 국물을 닦아준다.</p><p class="ql-block">간이 맞는다는 건 말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읽는 일이 아닐까.</p><p class="ql-block">우리의 은빛 인생은 이제야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시작했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2026년 년말에 문화시대에 발표되는 작품</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