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추억속의 설날</p><p class="ql-block">맹영수</p><p class="ql-block">생활이 많이 풍요로워진 지금은 평소 먹을거리도 많고 이런저런 이벤트도 많아 다채롭기에 응당 즐거운 기분이여야 하지만 왠지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별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명절은 가족이 모여 즐겨야 할 날이거늘 대체 뭐가 문제일가? 이런 의문이 들수록 옛 설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면서 깊은 추억에 빠져들게 된다.</p><p class="ql-block"> 지난 세기 70년대엔 우리들의 생활수준은 기본상 비슷했었다. 그때는 돼지고기, 물고기, 솜과 천, 그리고 명표 자전거, 등에 대해서 모두가 표제를 실시할 정도로 물질이 풍요롭지 못하다보니 명절, 특히는 설날은 우리들에게 각별히 기다려지는 그런 날이였다. 적어도 설날이 돌아오면 강냉이 섞인 이밥에, 명태국이나 돼지고기국을 맛볼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세배값으로 50전이나 1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가끔은 새 신이나 혹은 새옷도 차례질 수가 있었으니 말 그대로 기분이 붕 뜨도록 너무 좋았다.</p><p class="ql-block"> 해마다 설이 돌아올 즈음이면 우리 집에서 제일 드바삐 보내는 건 엄마였다. 엄마는 설날에 맞춰 그동안 모아놓은 콩을 밥상우에 올려놓고 슬슬 굴렸다. 그리고 골라낸 콩을 물에 불궈 싹을 튀운후 구멍 뚫린 양철통에 잘 펴놓고 그우에 얇은 보를 덥어 싹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다시말하면 설날에 먹을 콩나물을 키우고 있었다. 그때는 생활형편이 넉넉치 못하다나니 콩나물채도 일종 맛좋은 채에 속하고 있어서 명절때나 군일때에 어김없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p><p class="ql-block">콩나물을 기르는데는 물주기가 자못 중요했다. 물을 적게 주면 자람새가 좋지 않고 그렇다고 물을 너무 자주 주면 뿌리가 특별히 빨리 자라면서 자칫하면 뿌리가 썩기에 엄마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밤중이나 새벽쯤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한번씩 더 물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해마다 설 림박이면 시름놓고 주무쉬지못했다. 콩나물이 무럭무럭 자랄 쯤이면 엄마는 휴식일을 리용하여 밀가루포대를 메고 부근 농촌을 찾아서 한족 농민들한테서 찹쌀을 바꿔왔다. 엄마는 설날이면 떽메소리가 나고 떡이 올라와야 설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p><p class="ql-block"> 엄마는 설 밑이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인채 한기가 들어와도 출입문을 활짝 열고 먼지털이를 시작했다. 그래야만 새해의 첫날부터 복이 슬슬 들어온다고 굳게 믿었다. 먼지털이가 끝나면 엄마는 식구들의 옷과 양말들을 밤늦도록 한뜸한뜸 기웠다. 가끔씩 바느질을 하는 엄마의 눈에 이슬이 맻히는 걸 볼 때가 있었다 .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난때문에 설날이 돌아와도 자식들에게 새옷 한벌 못해주는 안따까움이 자책으로 번져 떨꾼 엄마의 눈물이였다.</p><p class="ql-block"> 드디여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 아침이 밝아왔다. 잠결에 고기익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누가 내앞에 차례지는 고기국을 앗아가기라도 하듯 후닥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밥익는 냄새와 고기익는 냄새가 어울려 목젖을 방아 찧게 만들었다. 이제 곧 고기국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군침을 꿀꺽 삼키며 사내놈답지 않게 가마목을 뱅뱅 돌아쳤다. 그것이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엄마는 가마뚜껑을 열고 고기 한점을 주어 맛보게 했다. 야하! 말 그대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그맛, 지금도 나는 그때의 돼지고기맛을 잊을 수 없다.</p><p class="ql-block">드디여 엄마의 정성이 한가득 푸짐한 설날 아침밥상이 차례지였다. 찰떡, 이밥, 고사리, 콩나물, 모두부와 닭알볶음, 그리고 감자국수를 넣은 돼지고기국과 여러가지 김치들...말 그대로 평시엔 볼수 없는 진수성찬이였다. 엄마는 설날은 정을 나누는 날이라면서 오보호 차할머니와 이웃집 최씨 삼촌도 초대했다. 모두들 밥상에 빙 둘러앉아 오랜만에 맛좋게 음식을 들면서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았다.</p><p class="ql-block"> 음식상이 끝나자 설날의 분위기는 한결 고조되였다. 이웃집 최씨 삼촌의 제의로 흥겨운 오락판이 벌어졌다. 엄마의 노래에 맞춰 누나가 덩실덩실 추는 춤도 보기 좋았지만 우리를 배꼽이 빠지도록 웃게 만든 건 뱀처럼 허리를 꼬며 추는 최씨 삼촌의 막춤이였다. 오락판이 끝난후 남자들은 웃방에서 장기놀이를 시작하고 녀자들은 아래목에서 트럼프놀이를 하다가 오후쯤 되여 다시 도란도란 모여앉아 물만두를 빚었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기여들쯤 물만두가 볼롱볼롱 뜨자 사람들은 또다시 음식상에 모여앉아 늦도록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워갔다.</p><p class="ql-block"> 허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머리 푼 추억으로 되여 먼 옛말으로 되였다. 솔직히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롭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별로 없이 너무 편해 발에 털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가난이 물러간 자리에 고독이 자리잡으며 이웃정, 형제정,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도가 멀어져가고 있다. 언제부터 핸드폰 하나로 살아가는 세상이라 사막처럼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 이제는 설날이 돌아와도 오손도손 모여앉아 시름없이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보기가 가물에 싹 나듯 쉽지않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한가족이여도 외국이나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보니 옛날처럼 오손도손 모여앉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잘 사는 세월이라지만 겨울나무처럼 고독을 삼키며 온정을 느끼지 못하는 홀로인 사람들이 적지않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인정과 사랑이 그리워, 웃음꽃과 효도가 그리워 저도모르게 주르륵, 아픈 눈물을 흘리고 있다...</p><p class="ql-block"> 누가 그랬더라, 가난속에도 행복이 있고 눈물속에도 웃음이 있다고, 이제는 바람따라 멀리 간 그 시절, 허나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 기분, 사실 가난만 빼면 사람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그때의 설기분은 그 얼마나 즐거웠던가.</p><p class="ql-block"> 그래선가 국 한사발에도 정이 오고 가고 술 한잔에도 웃음꽃이 피던 그때의 설날이 새삼스레 너무 그립기만 하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