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이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숲’ 장학문화재단 (준)] 일화 ㅡ 2023626 一

扶宣(拒私聊)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나눔 “ 활동을 꾸준히 견지해온 시니어들이 &lt;장학금&gt;을 모아 [‘덕이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숲’ 장학문화재단 (준)] 장학생들을 후원하는 그룹입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로인절을 맞으며 부분 회원님들이 살아온 삶에 자랑을 느끼며 여가에 쓴 글을 추천하며 일독을 권장합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 편집부 (延边妇女)</span></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중덕-덕림] 1004 (후원팀)회원들</span></p><p class="ql-block"> <span style="font-size: 22px;">앞줄 좌로부터 최옥자, 김행자, 김인옥</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뒤줄 좌로부터 전해순, 전순희, 지영금,</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김정숙, 최금녀</span></p><p class="ql-block"> </p> <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b></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22, 126, 251); font-size: 22px;"> 서 예 의 매 력</b></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22, 126, 251); font-size: 22px;"> -최 옥 자 </b></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는 2017년 4월, 70주세 되는 해에 좀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명동서예학원에 발을 들여놓고 서예에 새로운 도전을 했다. 늘 배우는 자세라면 특별히 얻는것이 많을것이고 배움속에는 그 락이 끝이 없음을 확신했기때문이다. 다소 늦었지만 어쩌면 가장 빠른 시간이라고도 생각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02년 9월에 영어공부 시작할 때에도 금방 퇴직 할 나이 55주세였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에서 활약하면서 중한녀성문화교류와 평생교육공부를 하였다. 그 당시 한국과 교류할 때 간혹 교류 문건들에는 영어단어들을 많이 사용하군 했는데 그때 영어를 모르기에 알아보기 힘들었고 더욱이 우리를 연변의 조선족녀성리더라고 높이 대우를 해주는데 너무 부끄러운 감이 들었다. 하여 연변로간부대학에서 첫번째 영어반을 개설할 때 등록하고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이제는 영어문맹의 모자를 벗어던지고 문장도 읽을 수 있고 손군들의 영어공부도 들여다 볼수 있게 되였다. 재미를 붙인 나는 현재에도 월요일과 수요일 오전이면 책을 들고 영어공부를 다니고 있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들을 이뤘을 때 느끼는 성취감, 기쁨, 이런 감정들이 바로 행복이 아닐가 한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서예공부 5주년 되어가면서 총화해 보면 명동서예학원의 서영근원장님의 지도하에서 판본체, 궁체정자, 궁체반흘림, 궁체진흘림 등 여러가지 서체를 배웠고 서예작품도 60여점 창작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새로운 도전은 열성과 부지런한 노력이 필수였다. 서예는 마음을 수련하고 자신의 품위를 높이는 고상한 문자예술이다. 매 한점의 서예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좋은 글을 접하게 되고 기억하게 된다. 서예작품을 창작 할 때 첫째로 글의 내용, 둘째로는 어떤 서체를 선택할것인가를 구상하게 되니 치매예방도 최고인것 같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는 연변주 혹은 연길시서예대전, 중한서예교류전 등 작품전이 있을 때마다 서예작품을 창작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18년 8월에 처음으로 “조선문자서예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하게 되였는데 그 때 스스로에게 “대단하다”는 칭찬을 해주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면 성공한다”는 리념을 가지게 되였고 신심도 생겼다.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서예공부 또한 “얼마를 뿌리면 얼마만큼 거둔다”는 말처럼 노력이 있어야 풍만한 결실이 맺는것이였다. 또한 서예공부는 추호의 거짓도 없이 반드시 최선을 다해 기본공훈련을 해야 했고 여러가지 서체교재들을 수없이 참고하면서 매일 쓰기훈련을 거듭하면서 매 작품을 선생님의 점검을 받아야 했고, 스스로 부족점을 찾아가면서 수정하여야 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19년 5월1일에 신흥광장에서 명동서예현장휘호대회에 참가하였다. 바람이 불어 선지가 날리면서 먹이 쏟아져 옷을 적시였지만 끝까지 견지하여 끝끝내 작품을 완성해 냈다. 서예현장휘호는 서예의 기본공을 검정받는 좋은 기회였는데 심사위원들의 평의를 거쳐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정말 뜻밖의 상인것이다. 이를 계기로 배움의 락으로 신심과 용기를 가지고 학원공부 시간 외에도 집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부지런히 서체 기본공 훈련을 다그쳤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19년 8월, 중국조선문자서예대전이 만달광장에서 진행되였는데 평심을 거쳐 나는 서예에서는 최고의 상인 대상을 수상했다. 마치 하늘에서 별 따온 기분이랄가 날아날것 같은 기분이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19년 9월 6일에는 저명한 시인 석화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전국애심녀성포럼에 석화선생님의 시 “사랑의 마음” 을 서예작품으로 창작하여 대회에 증정하는 영광도 가지게 되였다. 비록 명필은 아니지만 그 서예작품을 족자로 만들어서 대회에 증정하니 마음이 여간 뿌듯한것이 아니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지난 5년간 서예공부를 하면서 한국 강원도녀성서예가협회교류전에 매년 2차, 한국동양미술전에도 출품하여 동상, 은상, 금상을 받고 초대작가명예도 지니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매번 새로운 도전이 있을 때마다 나는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군 하였다.</span></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21년 9월에 [길림신문] 사랑렐레이프로그램에 서예작품 2점을 (부모에 대한 효도, 선렬들의 혁명정신 가송하는 내용)출품했는데 서예재능을 발휘하여 재능기부로 봉사활동도 할 수 있어서 더없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본인이 소유하는것보다 남들에게 준다” 는것은 더없이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20년7월18일, 습근평총서기연변시찰 5주년을 기념하여 연변가정연구소 문화봉사자팀이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에 가서 "총서기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이벤트를 추진하였다. 그때 나는 광동촌홍색문화기지중심에 “초요사회건설에 어느 한 민족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는 습근평총서기의 지시를 쓴 족자를 증송하여 이벤트에 이채를 더했고 현지 지도자도분께서도 만족과 감사를 표시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매년 8. 1건군절이면 퇴역군인들께도, "110경찰절"에는 삼합출입경검사소 경찰들한테도 서예작품 증송하고 “오덕된장절”과 오덕된장유한회사 새청사입주식에도 두폭의 족자를 증송하였고 “독서절”에는 연변대학도서관에도 서예작품을 증정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다. 서예를 배우면서 재능기부도 하고 무료봉사도 하였는데 창작하여 증송한 작품이 총 22 점 된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22년12월과 2023년5월에 신화서점과 련합하여 서예작품 전시를 진행하여 작품판매액을 애심기금으로 하였고 매번 매개인이 서예작품을 2점 출품하였는데 두번에 4점 모두 팔려 애심기금에 기부되였는데 사랑과 나눔봉사의 기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현시대를 따르는 멋지고 우아한 어른 -할머니가 되는것이 나의 소망이다. 나는 컴퓨터를 잘 다루고 지능핸드폰으로 위챗을 능란하게 조작하고 사진촬영과 편집에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군 하였다. 봉사도 잘 하여 "아마추어 편집장"이라 불리우곤 하는데 은근히 뿌듯하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5년간 업여애호로 美篇制作160편, 小年糕制作 25여편을 완성하였고 손군들에게, 형제들과 친구들한테 미편을 편집 한 후 보기 좋게 인쇄본을 묶어서 선물하기도 했다. 서예작품 100여장을 사진으로 정리 및 책으로 인쇄하여 지인들에게 기념으로 증송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서예의 매력"을 손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금빛찬란한 동년", 1, 2책을 , 손녀에게는 손녀의 미술작품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보는 오색령롱한 동심세계" 1, 2, 3, 4책을 사진촬영제작하여 기념으로 남기고 형제들한테는 "장백산 여행기"를, 친구들한테는 "로리커호여행기"를 책으로 만들어 증송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또한 초, 고중동창회모임, 문화봉사자팀 활동기 등 사진촬영후 편집하는데에 모든 정력을 들였다. 미편편집제작 완성 및 발송후 많은 분들이 만족해하고 즐거워하면 나의 기쁨도 배로 늘어났다. 내가 제작해 낸 어떤 미편은 조회수가 6500회 넘을 때도 있었다. 전파속도가 대단히 빠르다는걸 느꼈고 기쁜 일들을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위챗시대에 현시대어른이 된 자호감을 느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늘 배우는 자세로 행동하면 특별히 얻는것이 많을것이다. 배움속에는 그 락이 끝이 없다" 하지 않는가. 황혼인생에 홀로서기를 잘 하면서 항상 배우고 익어가는 늙은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되며 멋지고 우아한 엄마로, 할머니로 되는것이 이젠 내 인생의 목표이다. 자식들에게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으로 본보기를 보여주며 배움의 락을 만끽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수업을 못할 때 손녀에게 판본체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올해부터는 며느리와 손녀도 명동서예학원에 와서 서예를 배우고 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서예의 매력으로 70청춘 닐리리를 부르면서 정년퇴직 없이 계속 할 수 있는 직업ㅡ서예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배움에 게으름없이 노력하고 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올해에는 한자서법에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앞으로도 영어공부, 서예공부 열심히 하고 사회단체에 자원봉사도 하고 장학사업을 후원하는 일에도 참여하면서 뜻깊고 의의있게 황혼인생을 즐기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련다.</span></p> <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color: rgb(22, 126, 251);"> 인생의 남은 수업에 최선을 다하여...</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color: rgb(22, 126, 251);"> -김정숙 </b></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정과 열을 다하던 일터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하게 되였다. 나도 여느 사람들이 말하는 “성 쌓고 남은 돌” 대오에 합류하였다. 허전하다고 해야 할지, 자나 깨나 머리를 떠나지 않던 일터, 신경을 도사려 보던 시험관들이 눈에 삼삼하여 진짜 한동안은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50대중반이라는 나이, 어느 순간 나는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두뇌는 명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뇌리에 자리잡기 시작하니 인생의 남은 수업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편안하게 먹고 싸고 자고... 무념무상의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우선 연변대학문화교육원 &lt;생명의 전화&gt; 상담원 양성프로그램 강좌에 등록하였고 수료증( 제5기)을 받고 전화상담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아직 여력이 있고 열성이 있고 정년을 멋지게 보내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모델로 나는 이어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제2기) 리사회에서 평생교육을 받고 자신의 소질을 제고하였다. 와중에 나는 모름지기 재직시절 못다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아쉬움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우선 외국에 간 자식에게 못다한 정성을 손군을 잘 보살펴주는것으로 보상할 궁리를 하였다. 면바로 그때 며느리 임신소식을 접하였고 손녀 생후 4개월만에 나는 덥석 손녀를 내품에 받아 안는 결단을 내린것이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손군을 먹여주고 입혀주는것으로 자식의 육아부담을 덜어주는것으로 만족할것이 아니라 건강한 인재로 키워내는것이 진짜 아들며느리를 사랑하는것. 이것을 나의 후반생 목표이자 남은 수업으로 결정하고 나니 “후반생에 출전”하는 전사마냥 은근히 흥분되여 “ 아기 낳기전에 포대기부터” 갖추기 시작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우선 “0세교육” 관련 도서를 열심히 읽었고 정년퇴직후 시작했던 일은 자식들에게 가차없이 이교하고 손을 뗐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생후 넉달밖에 안된 손녀를 키우는 동안 밤잠을 설치고 손녀가 아파하기라도 하면 속을 끓이는 등 힘들 때도 많았지만 손녀의 재롱에 빠져서 입에 귀에 걸리기 일쑤였고 자라가는 모습에 취해서 세월 가는줄 몰랐다. 진짜 자식 키울 때의 느낌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손녀의 똥까지 자랑하며 즐거워하는 할머니를 생각해보라. 그 모습이 나여서 모름지기 웃음이 날 때도 있었지만 즐거운걸 어쩌겠는가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는 무슨 일에 빠지면 올인하는 “전사”가 되는 성미인지라 생후 4개월이 된 손녀를 품에 받아안은 순간부터 “손녀와 함께 성장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손녀를 기르는 동안 쓴 일기책은 무려 20여권이나 된다. 나의 “손녀와 함께 성장하는 일기” 책을 본 친구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름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손녀의 학습마당 꾸미기” , “례모교육은 이렇게”, “공부는 ‘틀’이 없이”, “예체능흥취 양성은 지력개발의 밑거름”, “활용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세살적 버릇을 중시하자”, “자각성과 지구력 양성을 병행하자” 등 내용을 기록한 “나의 육아일기” 경험은 &lt;혼자 걸으면 오솔길, 함께 걸으면 큰길이 된다&gt;는 연변가정연구소 문화봉사자기념문집에 수록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공든 탑이 무너지랴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손녀는 다섯살이 되니 조선어문, 수학 1학년 수준이 되였고 피아노, 무용써클 시합에서도 1등의 영예를 따내기 시작하더니 열한살에 피아노연주급을 마쳤고 전국콩클에서 수차 금상을 타왔다.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우수학생, 길림성 우수학생 영예를 따내더니 공청단에 가입하고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 꾸준히 노력을 경주하면서 50여개의 영예증서를 받아안더니만 대학입시에서는 중점대학인 광주외국어대외무역대학에 록취되는 영예를 따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대학에 입학한후에도 장기를 살려 악기동아리 대장직을 맡았고 전교 합창시합때는 학급합창대 피아노반주자로 출연하여 전교 1등상을 따내기도 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학업성적도 계속 우수하여 영어&lt;하이 클래스 (high class)&gt; 반에 편입되기도 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례절 바르고 학우들과의 단결도 잘하여 인기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지난 방학에 와서 알바하여 얻은 돈으로 집에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해준 손녀. 자꾸 자랑을 하고싶은 손녀에게 내가 양성한 보람을 느끼며 잘 따라준 손녀에게 감사한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손녀육아를 “졸업”했지만 “인생의 남은 수업에 최선을 다하자”를 좌우명으로 손녀의 조기교육에 탕개를 늦추지 않은 정성과 열정으로 연변로간부대학 성악반에서, [중덕-덕림] 1004 (후원팀) 활약하며 긍지를 느끼고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 분투에는 락이 있거늘 ...”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span></p>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중덕-덕림] 1004 (후원팀) 창립멤버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앞줄: 김행자</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뒷줄: 죄로부터 최옥자, 김인옥,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지영금, 김정숙</span></p> <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color: rgb(22, 126, 251);"> 특 별 한 졸 업 식</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color: rgb(22, 126, 251);"> - 전순희 </b></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대지가 온통 진한 록색으로 이쁘게 단장한 6월.배움의 욕구로 몸담구었던 정든 교실과 학생들에게 지식의 날개를 펼쳐주려고 밤낮없이 수고하신 은사님들과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이색적인 졸업식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하나하나 소중한 추억들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자리매김하는 계절...</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시계바늘을 돌리고 돌려 우리들도 당년의 그때 그 시절을 되돌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들도 정식”졸업식”을 몇번 치렀는데...</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인생의 황혼길에서 정년 퇴직을 맞은 우리들은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피부로 느끼면서 로후 보장이 잘되여 만년을 풍요롭게 보내게 되여 너무 행복하다. 우리동년배 친구 몇몇은 여유시간을 더욱 뜻깊게 보내기 위하여 연변로간부대학 성악반에 다니기로 약속하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매번 월, 금오후 상학하는 날이면 우리는 정갈한 옷차림에 연한 화장까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등교하여 학원님들과 반갑게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누면서 조용히 상학시간을 기다렸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정각 한시가 되여 교학이 시작되면 선생님께서는 우선 반시간동안 발성련습을 가르치셨는데 우리더러 걸상 뒷면에 기대앉지 말고 걸상 절반에 가슴을 쭉 펴고 두손을 무릎우에 얹고 반듯하게 앉아 배로 심호흡 할것을 요구하셨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마,메,미,모,므로부터 시작하여 미이야~ 미이야~ 미이야아~ 야아아~</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노래부르기도 좋아하고 듣기도 엄청 좋아하는 우리였지만 정작 교실에서 발성연습부터 하자니 처음에는 어쩐지 조금 어색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러나 선생님 가르치심에 따라 입도 손가락 두개가 들어갈만큼 동그랗게 벌리고 하니 제법 그럴싸 해졌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다음 선생님께서는 시창으로 음정 리듬훈련도 하고 악리도 가르치셨는데 이젠 노래 마지막에 “도”로 끝나면 “대조”, “라”로 끝나면 “소조”라는것도 알게 되였으며 “CoDa(코다)”로 표시되면 다시 돌아가서 반복해서 불러야 한다는것 등등 들어도 못본 음악술어들도 익숙해졌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발성곡으로 지정된 외국가요 “송별”을 부를 때에는 늘 마음속으로 인간은 반가운 만남후에 반드시 서로 갈라져야 하며 또다시 훗날의 만남을 기약하게 된다는것을 명기하면서 오늘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노래시간이면 온갖 잡념도 다 사라지고 흥이 나서 부르고나면 기분이 힐링되여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또한 우리가 백세시대에 부응하려면 건강이 최우선인데 노래를 부르면 페활량도 증가되고 가사도 기억해야 하니 기억력제고에도 도움이 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연변로간부대학 성악반에 다닌지도 어언간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강산도 여섯번이나 변하였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멈춘듯이 아직도 꿈과 열정으로 차넘치고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드디어 학교에서 졸업식을 한다 했다. 우리도 바야흐로 학교를 떠나야 하고 존경하는 선생님과 정든 학원님들과 석별의 정을 나눠야 하는 아쉬움속에서 졸업식 준비를 해야 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모두들처럼 무엇보다 품위가 있고 간소하면서도 영원히 기억에 남을 “특별한 졸업식”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여서 영상제작을 담당한 나는 신경을 도사릴수 밖에 없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졸업식장 장식에, 추억앨범제작까지 신경써야 할 부분들이 수두룩하였지만 반장과 많이 상논한 덕에 주요한 사항은 거의 마무리 지을수 있었다. 특히 나는 첫번째순서에 “연변로년대학 성악 2반 졸업식”을 두번째 순서에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세번째 순서에 “ 반장, 위원님들도 수고하셨습니다 “로 편집하였는데 선생님께서 피아노 치는 사진과 반장, 소조장들의 사진까지 찍어서 합성하였더니 너무나 멋진 영상이 완성되여 스스로 흡족감을 느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지금 이시각 나를 필요로하는 곳이 있고 나의 자그마한 재능이 빛을 발할수 있다는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큰 행복인가를 실감하는 좋은 계기가 되여 너무 기뻤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예정 졸업식장소에 리허설때문에 갔었는데 유관부문의 책임자가 메모리를 컴퓨터어에 입력해보시더니 “누가 이걸 만들었어요?” 하셔서 “제가 했는데...” 하니 다소 믿기지 않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셨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어쩜 이렇게 할수 있어요?! 너무 잘 했습니다.” 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아 도리여 내가 좀 쑥스러울 지경 이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우리의 “졸업식 날”.</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이른 아침부터 학원들 저마다 이쁜 단장에 설레는 마음으로 졸업식 식장으로 삼삼오로 모여왔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남성 학원들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가쭌하게 매고 멋진 신사로 탈바꿈하였으며 어여쁜 한복차림을 한 녀성 학원들은 선녀들도 무색할 정도로 아릿다움을 뽐내며 영상스크린앞과 꽃다발앞에서 조별로 선생님을 모시고 멋진 포즈를 취하느라 들뜬 모습들. 소중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남기느라 여념이 없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졸업식”개회 선포와 더불어 우리 전체학원들은 격정가득히 “그대따라 가는 길”,”동창 찬가”를 열창하였으며 반장의 총화에 이어 선생님의 수고에 감사를, 우수학원표창까지 진행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건당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우리 반은 리춘희작사, 김경률선생님께서 작곡하신 “영원히 당을 따라 나아가리”를 “환락연길대무대”에서 대합창으로 열창하여 관중의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당년 &lt;전주서법전시회&gt;때 나는 그 노래를 서예작품으로 출품하여 전시하였었고 이번 “졸업식”에서는 그 작품을 선생님께 기념품으로 증정하였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졸업식” 제2부에서는 학원들의 장기 자랑이 분위기를 고조에 이끌었다. 그 동안 성악반에서 열심히 배우고 제고된 실력을 박수갈채속에서 검증받는 시간이기도 하였는데 성악반에서 맺어진 우정이 우리의 인생 황혼을 더욱 붙다오르게 하였으며 “청춘”을 되찾은듯 하여 감개무량하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인생의 황혼길에서 이렇게 “로년대학”에서 만나 동행할수 있음에 감사하는 “졸업식”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특별한 사람들이 치른 “특별한 졸업식”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희망과 정열로 가득찼던 오늘의 즐거운 순간순간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세월이 흐른후에도 생생히 돌아볼수 있을 아름다운 추억들이 오래오래 우리 맘속에 남아있기를 기대해본다.</span></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22, 126, 251); font-size: 22px;"> 나는 “핸드폰대학생”이다</b></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22, 126, 251); font-size: 22px;"> - 최금녀 </b></p><p class="ql-block"> </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여느 사람들은 우리 집을 “문학 가문”이라고 말했습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한것은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 큰 조카, 손자까지 줄줄이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문학을 좋아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문화혁명 때 큰 오라버니가 “ 반혁명분자”, “조선특무” 루명을 쓰고 투쟁을 받은 탓에 추천이 없이 대학공부를 못하는 때라 공부 기회를 잃고말았죠.</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내가 바란다고 될 일도 아니고 “ 계급투쟁”을 이겨낼 희망도 없으니...</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공부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스물한살 어린나이에 좋은 혼처가 나오니 덜컥 결혼을 하고말았습니다. 잇달은 육아에 팍팍한 살림살이에 빠져 책 읽기마저 잊고 살았던 나날. 어느덧 아이들이 학교에 가게 되자 슬슬 “공부생각”이 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손 놓았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일기쓰기, 심득필기를 시작하게 되였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곁에서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어느 날 “ 너는 글 쓰기를 좋아하는데 로년대학을 다니지 그러냐?! “ 하며 새로 설립된 &lt;천선복로인대학&gt;에 함께 등록하자고 꼬셨습니다. 그야말로 듵다 듣다 좋은 소식이여서 이튿날로 등록하고 &lt;대학생&gt;이 되였습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02년부터 학교문을 닫기까지 7년동안 나는 진짜 학구열을 불태우는 “대학생” 이 되여 &lt;천선복로년대학&gt; 측으로부터 몇 안되는 “인재”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lt;로년대학&gt;에서는 정규대학처럼 전공과목이 따로 없지만 실용과목을 배울수 있어 좋았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우선 인터넷을 활용하는것을 배워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는것”이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세계를 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다 스마트폰이라는 핸드폰이 새로운 학습도구로 보급되니 시간 가는줄 모르고 스마트폰에 빠져들었습니다. 더구나 딸이 사준 스마트폰은 공능이 좋아서 &lt;좋은 글&gt;, &lt;이야기 모음&gt;, &lt;명언 집성&gt; 등 전문란의 글들을 접할수 있어 인생을 더 보람되게 사는데 유용했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를 인터넷 글에 깊이 빠지게 한 &lt;글&gt;은 청도작가협회 림동호선생님의 &lt;이야기군&gt; 시리즈입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실 생활이야기, 구수한 입담과 친절한 사투리 등이 그렇게 마음에 다가올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림동호선생님의 &lt;이야기&gt;를 기다리는 팬이 되였고 따라서 지인들에게 부지런히 “퍼날랐습니다” . 어느 정도로 &lt;퍼나르기&gt;에 극성을 부렸으면 친척들의 “사랑하냐?’는 오해도 받고 “ 애인”이냐 롱담을 하는 지인이 생겼겠습까?!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러면서도 나의 열성에 “엄지척 “ 이모티콘 보내주는것 잊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늦을라치면 독촉의 메시지 보내오고요. 더욱 성수난것은 김영화라고 부르는 작가분이 림동호 “이야기”를 &lt;미친소&gt; 합정본을 묶어 림동호작가님에게 선물한것입니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이 일이 있은 후 , 림동호작가님은 나를 &lt;좋은 글&gt;전문란 그룹장(群管)으로 임명하였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는 지난 몇년동안 이른 아침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좋은 글을 쓰고 올리는데 정과 열을 다 바쳤다고 자부하며 보람을 느낍니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이른 아침 다섯시에 핸드폰 열고 모멘트에 올리는 &lt;좋은 글&gt;을 소장했는데 자동 삭제되는 경우가 있어서 필기책에 적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보는분들 때문에 게으를 수가 없고 또한 그만큼 믿음을 받는다는것처럼 뿌듯한 일이 어디 있을가 싶어 고맙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lt;로년대학&gt;을 “졸업”하자 나는 사회단체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였고 연변가정연구소의 교육프로그램 - &lt;평생교육강좌&gt;를 청강하고 문화봉사자 일원으로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 나눔, 봉사”를 실천하는 적극분자가 되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현재는 [중덕-덕림]1004 (후원회) 회원이 되어 &lt;덕이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숲 - 장학문화제단 (준)&gt;이 후원하는 장학생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좋은 글”은 삶의 질을 제고하는 “무기”라 인식하며 “좋은 글” 전문란을 배움터로 삼고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친구님들에게 &lt;퍼나르기&gt; 적극분자로 멋있게 “핸드폰대학생”으로 살것을 약속합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 2023. 06. 26 ) </span></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b><b style="font-size: 22px; color: rgb(22, 126, 251);"> “일심 장학금”의 탄생 </b></p><p class="ql-block"><b style="font-size: 22px; color: rgb(22, 126, 251);"> - 김행자 </b></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어릴 때 나는 아버지와 사진책을 보면서 멋진 청년 넷이 찍은 사진을 짚으며 아버지에게 호기심의 눈길을 돌렸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젊었을 때 생활이 가난했지만 월사금을 낼수 없어 공부를 못하는 고아 넷을 도와서 공부시켰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공부할수 있은 “고아” 넷이 자라 멋진 기념사진을 아버지에게 남긴것이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때 나는 크게 감동받았고 아버지가 너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야~ 우리 아버지 참 대단하셔!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때 그 감동은 어른이 되여서도 잊혀지지 않고 나의 마음에 큰 여운을 남겼다. 일상 생활에서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도와줄수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자기 용돈의 일부를 떼내여 남을 돕은 일을 모름지기 하는것을 인지상정이라 단언하는것은 착각이 아닌지?!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아버지를 존경했고 닮으려 했던 그 마음과 생각을 실천하기까지에는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청상과부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시동생 병치레에 자식 넷을 거느리고 아픈 남편을 돌보느라 늘 바빴고 부족했던 삶을 영위하다 보니 잊고 살았던것 역시 사실이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런데 그 행운이 “나의 인생에 가장 보람차고 황홀했던 황금기 ㅡ 퇴직하고 60대 ~ 70대 사이”에 찾아올줄이야.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내가 선택한 옳바른 길, 좋은 인연을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것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1998년 11월, 연변대학문화교육원 “생명의전화” 출범식에서 박민자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바로 &lt;혼자 걸으면 오솔길, 함께 걸으면 큰길&gt;을 걷게 된 첫시작이였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아름다운 만남이 장장 20여년 세월의 흐름따라 흔들림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어질줄이야.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누군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뀌고 ,어떤이와 어울리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달라진다” 하였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솔직히 그때 박민자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처음 인상은 공직 시스템에 드팀없이 훈련된, 어딘가 경직된것 같은 자세 등은 좀 까다로와 보였다. 그러나 “생명의전화” 상담원양성프로그램의 특성상, 그리고 분위기때문이였는지 나도 모르게 자석마냥 그에게 다가가고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였고 와중에 그의 요청으로 나는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회계사업(자원봉사)을 하게 되였고 나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계기를 맞아하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우리의 만남은 장장 2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와의 만남이 있어 크나큰 행운을 가질수 있었고 후반 생에 같이 할수있는 동반자를 찾은 기쁨으로 너무 행복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박회장과 함께하는 나날에 우리 민족에 대한 그의 애착심, 끈질긴 사업심과 불타는 열정 등 우수한 성품을 발견할수 있었다.</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나의 후반생에 빛이 되여주고 아름다운 꿈을 가꿀수 있는 힘이 되여준 일 – “ 덕이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숲 장학문화재단(준)에 동참하게 되였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숲 장학문화재단 (준)” ( 간칭 &lt;덕림&gt;)은 박민자회장님이 1997년에 발족, 추진한, 무릇 우리 민족 후대양성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십시일반으로 “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따뜻한 마음의 “부자”들은 다 동참할수 있는 프로그램이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의 우리 민족 인재발굴양성에 정성을 몰부어 키운 수백명의 장학생들을 보느라면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고 그의 “사랑, 나눔, 봉사” 의 정신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처럼 큰일은 할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짐을 덜수 있게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05년 실제행동에 옮겨 “덕림장학재단 (준)”에 딸들의 이름을 본딴 “ㅡ心”천사기금을 만들었다. &lt;덕림&gt; 20주년 기념행사에 “ㅡ心”천사기금 만원을 기부하고 (현제까지 21,500원을 기금으로 루적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는 &lt;덕림(준) 리사회&gt;로부터 “천사할머니”로 호칭된 감사패를 받았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아껴서 나누는 싹을 키워주신 분이 바로 박민자 회장님이다.“나눔은 되로 주고 말로 받으며 행복은 나눔으로부터 시작된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누구인가에게 도움을 줄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해지고 행복감에 젖기도하여 내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된다. 좋은 사람들과같이 인생을 살아간다는것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2018년 크리스마스에 “덕림장학재단 (준)”학생회에서 보내온 “천사 김행자님”이란 제목의 편지를 받은 나는 감동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흥분되여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내가 하고픈 일이 작은 일이지만 참 잘했다며 네 딸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의 박수와 함께 “엄마가 하고픈 기꺼운 일들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고무해준 딸들이 너무도 고마 웠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딸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때면 “ㅡ心”기금에 보태라고 마련해 주기도 하는데 더구나 막내가 “ 엄마가 힘들 때 &lt;일심장학기금 &gt;내가 계속 할게요” 한 약속때문에 더 보람되고 성수도 나고...</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열 아들 부럽지 않은 고맙고 자랑스러운 내 딸들과 “ 천사할머니 ”!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그날의 그 감동을 영원히 남기고싶어 나는 그 편지를 액자에 고히 담았다. 평생 상장도 많이 받고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내 인생의 최고의 상장은 장학생들이 준것이라 생각하기에...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김]해 김씨가문 딸로/ [행]복한 나의 인생에/ [자]선을 가슴에 품은 문화봉사자 김행자 ㅡ 섬기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을 깨닫고 또 감사할수밖에 없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나의 &lt;일심장학기금&gt;의 시작이 바로 내가 선택한 평생교육의 열매이기도 하다. 년장자로서 미래는 기약할수 없지만 지금의 상태에서 나의 생전에 덕림장학재단 (준)과 함께 할것임을 약속하며 덕림 장학재단(준) 30주년을 기약해본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20여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의 일생에 계몽선생이 되여주신 박민자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함께 하는 사랑하는 [중덕-덕림]1004(후원팀)원 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사랑합니다 !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 22px;"> ( 2023. 6월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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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6

美篇

群管

心心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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