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 문화상 응모작

민들레

<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추억의 사이판</span></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태명숙</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이판은 남 태평양의 북 마리아 제도에 있다. 섬의 서쪽은 모래 해변, 동쪽은 바위 절벽인데 1970년 초부터 사이판의 관광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새섬, 위령탑, 만세절벽, 등 유명 코스들을 찾았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서쪽 모래 해변에서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마냥 수평선 너머 그 사이로 구름과 바다가 맞 물려 보이는데 해가 지는 석양을 감상할때면 너무 황홀하고 정열적이여서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노랗던 해는 어느 틈엔가 주위를 붉은 색으로 불 태우고 햇살 비치는 부분은 영롱한 여러가지 색깔로 빛나면서 초보가 그냥 찍어도 작품이되고 그림이되는 그런 멋진 풍경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1980년대 후반부터 사이판 정부 로동청에서 정한 저렴한 인건비에 투자자들이 모여들었고 특히 한국에 본사를 둔 봉제 회사들이 그 작은 땅덩어리에 많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중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 여러 나라들에서 대량의 인력들을 모집했었는데 그 혜택을 나도 본 셈이다. 그때 나는 백화점에서 옷 가게를 오픈하여 한달에 한 두번은 물건 구입으로 연길 서시장에 갔었다. 로무로 사이판에 봉제공으로 간 처녀애들이 돈을 잘 벌어 집에 가끔씩 보내온다는 입 소문을 전해 듣었는데 모든 소식통은 그래도 연길이 더 빨랐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때마침 1992년 봄에 봉제공으로 시 정부 민정국에서 사이판 모집 공고가 있었다. 할빈에서 실기 시험을 봤는데 첫 선발대로 5명이 합격되면서 나만 애 딸린 엄마였고 넷은 20살좌우 처녀애들이였다. 그 당시 나는 두 자식을 위해 돈은 벌어야지만 할머니한테 맡기고 떠나기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던지, 밤 잠을 설치면서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그리고 실기 시험때부터 딸들이 걱정되여 할빈까지 같이 떠났고, 사이판으로 떠날때도 나의 두손을 잡고 딸들을 잘 부탁한다고 같이 떠나게 될 처녀애들 부모님들의 간곡한 당부도 어제 일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지방마다 외국에 나가 돈 버는 인식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우리 안쪽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처녀애들을 외국에 데려다 인신매매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도 있었으니 부모 입장에선 아마 큰 용단이 필요했을 것이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떠나기 전에 시 정부 관계자는 우리 선발대가 가서 열심히 잘 해야 이 모집이 끊기지 않고 더 많은 인력을 보내는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신신당부했다. 우리 일행은 북경에서 한국을 경유하여 4시간 넘는 긴 려정을 걸쳐 사이판 공항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바다가의 풍경이 제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했어도 우리에게는 이튿날부터 고되고 힘든 로동이 시작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봉제회사여서 재단반, 미싱반에 이어 완성반까지, 3라인이였는데 운이 좋게 나는 완성반에 배치되였다. 완성반은 오버 타임이 제일 많아 돈을 더 벌 수 있어 모두가 욕심내는 부서라고 연길에서 간 고참 언니가 얘기해주었다. 완성반은 불량품과 정품을 정확히 체크하는 정밀한 작업이다. 재단반에서 원단을 재단하여 각 봉제 라인에서 미싱사들이 만든 옷을 완성반에서 마무리 작업으로 제품이 나간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바이어가 주문한 몇 천장, 몇 만장의 물량이 콘테너로 나갈 때면 밤을 새면서 련 이틀 계속해서 작업 할 때도 가끔씩 있었는데 그런 날에는 식당 언니들이 남아도는 묵은 밥으로 누룽지를 부치느라 바삐 돌아친다. 왜냐하면 야참은 라면으로 떼웠지만 배가 고픈 것보다 퇴근하면 너무 졸려 식사 한끼쯤은 건너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완성반 작업은 온종일 앉지 못하고 서서 하는 부서라 발목이 붓고 실밥 따느라 쪽 가위질로 손목이 무척 아팠다. 그래도 한창 젊은때라 자고나면 괜찮아졌고 또 일하면 아프고 그런 련속이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첫 한달은 힘든 일과 열대하로 기후가 너무 더운 탓에 늘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컥거리면서 메스겁고 자주 토했다. 다행히 사이판에도 한국 한의원이 있어 점심 시간을 리용해 보름정도 침을 맞고 치료는 되였지만 한달도 안 된 사이에 4키로 넘게 살이 빠졌다. 지금은 다이어트를 하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빠지는 살과의 전쟁이지만 그 때는 어쩐지 너무 살이 빠져 많이 속상했다. 다행히 고향에서 떠나 올 때 엄마가 흙 한줌을 봉지에 싸주셨는데 그래서인지 물 탈은 없었지만 물이 안 맞아 배탈이 나서 고생하는 애들도 가끔 있었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마지막 한해는 기숙사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감이란 책임까지, 정말로 힘든 한해였다. 사무실에서 쭉 나를 지켜보면서 믿고 맡기는데 무보수라고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또 고향에서 함께 떠날 때 어린 딸들을 산 설고 물 설은 낮선 외국땅으로 보내면서 애 엄마인 나에게 잘 돌봐 달라던 부모님들의 부탁도 사감을 거절할 수 없는 리유였다. 내가 좀 힘들어도 기숙사를 위하는 일이면 애들을 위하는 일이고 맏 언니로서 최선을 다 하리라 마음을 굳혔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이판은 일년 사시절 비가 안오는 날은 별로 없지만 물 탱크로 비물을 받아서 샤워한다. 물 탱크에 저장된 많은 량의 물을 받자면 아침에 씻는 애들을 위해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물을 틀어놓고 저녁 물은 남들보다 15분 정도 먼저 퇴근해서 넓고 둥그런 큰 통에 채워 놓는다. 백 여명 애들이 돌아서서 바가지로 물을 껴 얹으며 희희닥닥 씻는 모습은 정말로 가관이다. 항상 물은 준비돼야 기온이 너무 더워 수시로 씻는데 지장없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오버 타임이 없는 날이면 저녁 9시까지는 기숙사에 인원이 다 들어 왔는지, 방마다 체크한다. 일요일 휴식날이면 기숙사가 텅 비다 싶이 썰렁하다. 피 끓는 젊은 청춘들이라 아침 일찍부터 동굴비치, 새섬, 반자이비치, 만세절벽, 위령탑, 등 유명한 코스들을 구경하느라 서로들 시간가는 줄 모르지만 사감이 실시하는 점검전에 기숙사로 복귀하는 것만은 모두가 잘 지킨다. 사감이 날마다 사무실에 올리는 아침 일지에 오르내리게 되면 사무실에 불리워 문책당하는 것 쯤은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이판은 사면팔방 바다를 끼고 있는 섬으로서 무지하게 더운 기온에 빈번히 바다에서 익사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를 방지하고 모두의 안전과 회사에서 정한 규정을 지키기 위해 사감은 수시로 기숙사 인원을 확인하고 애들이 밖에 나갈 때면 안전에 대한 당부말도 잊지 않는다. 한개 가정이라고 생각할때 사감이란 엄마의 역할이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남보다 덜 자고 일찍 일어나 생리통이나 그 어떤 사정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인원과 전날 저녁에 체크한 인원수, 그리고 기숙사에 꼭 필요한 용품들을 아침 일지에 함께 써서 사무실에 올린다. 기숙사의 깨끗한 환경을 위해 화장실 청소와 샤워장, 기숙사의 대청소를 조직하는 것도 사감이 해야 할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힘든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도 잘 버텼는지? 돌이켜보면 사이판에서의 적응기는 지금 한국에서 그 어떤 역경에서도 잘 버텨나가는 밑거름과 버팀목으로 자리 매김하지 않았을가? 젊은 시절의 고생은 천금주고도 바꾸지 못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이판의 기온은 얼마나 뜨거운지 바다가에서 몇 시간만 수영해도 해 빛에 그을러 피부가 까지고 새까맣게 타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달래준 은 싸락 같은 모래우에 또박~또박 발자국을 찍혀가면서 걷던 해변길이 고맙기만 하다. 휴식일이면 바다가에 나가 끝없이 펼쳐진 해변가를 걸으면서 잠시나마 집 떠난 설음과 그리움을 잊고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면서 저 멀리 멀어져가는 고기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도 했던 30년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일이 힘든건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야근이 없을 때는 고향에 두고 온 애들 생각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았고 이불속에서 울 때도 많았다. 그 때로부터 생각했던 건 나 자신은 힘들게 일하고 있지만 내 딸 만큼은 내 길을 걷지 않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에서 첫 봉급을 인편으로 고향에 보내 딸한테 영어를 전공하라고 부탁했다. 2년 계약이 완료된 시점에서 다른 애들은 연장을 했지만 난 애들 때문에 귀국했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시 정부에서는 우리가 일하던 사이판 회사와 계약이 계속 이루어졌고 3년후에 국제 무역회사에서는 사무실 조리로 영어전공 졸업증이 있는 능력 있는 처녀애 한명을 뽑았는데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딸이 합격되면서 딸도 이 엄마의 뒤를 따라 사이판에 가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다행히 딸은 나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되였다. 딸은 세관에 가서 바이어가 주문한 콘테너로 미국 본토에 나가는 제품을 확인하고 영어로 서류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회사 직원들이 아프면 병원도 데려가고 또 직원들 봉급도 나눠주면서, 하여튼 배운 영어를 유용하게 발휘하여 원없이 써 먹고 봉제공보다 월급도 많아 일거양득이였다. 거기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 결혼도 했고 출산도하게 되면서 한국에 있는 나한테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2003년 봄에 나는 딸의 산후조리로 또 다시 두번째로 추억이 깃든 사이판 땅을 밟게 되였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이판은 3월에 꽃나무가 잠간 졌다가 다시 피는데 일년 내내 꽃들이 만발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온화한 기후와 천혜의 자연 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사이판의 중심지인 가라판의 밤야경,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투명하고 선명한 칠색의 푸른 바다, 그 너머로 붉게 떠오르는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때면 와~하고 함성이 절로 난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사이판은 나의 땀과 동반된 젊음과 랑만이 묻어 있고 우리 모녀의 각자 추억과 나의 사랑하는 손자가 태여난 고향이기도 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사이판에 첫 발을 들여 놓은지 30여년이 지났어도 소나기가 쏟아진 뒤 아득하게 펼쳐진 저어~ 멀리 바닷가의 구름너머로 금방이라도 손이 닿을 것 같은 칠색의 아름다운 쌍 무지개가 걸려 있는 바다의 경치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기회가 된다면 일로 아닌 려행으로 꼭 다시 세번째로 가고 싶다. 나의 인생의 한 페지를 담은 추억속의 사이판으로! </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2023년 13호 "청년생활"에 실린 원본입니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font-size:22px;"> 2023.5. 25.</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