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회사, 가을로 익어가다 (하)

金成哲

<p class="ql-block">本文刊于《长白山》文学双月刊2023年第2期</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255, 138, 0); font-size: 22px;">중회사, 가을로 익어가다</b><b style="font-size: 22px;"> (하)</b></p><p class="ql-block">김성철 / 기행수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상편에 이어서)</p><p class="ql-block">관음전 좌측 돌계단을 딛고 한 층 높은 곳에 오르면 바로 중회사의 정전(正殿)인 지원법계(祗圆法界)를 만날 수 있다. 이 곳은 고승들이 설법하는 장소로서 맞배지붕양식의 검소한 건물이지만 정교하게 꾸며졌다. 이곳 정전 처마밑에 높이 걸린 “지원법계”편액에는 얽힌 전설이 있는데 여기서 잠간 그 전설을 풀어본다.</p><p class="ql-block">아주 먼 옛날, 중회사에는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년로한 주지(住持)가 있었는데 수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고 한다. 그 중에 한 제자가 그를 조석으로 정성껏 보필했다. 그러던 어느날, 병이 위중해진 주지는 자신의 입적(入寂)을 예감하고 뭇 제자들 불러놓고 면전에서 자기를 보필했던 제자한테 주지를 맡기면서 간곡히 당부했다.</p><p class="ql-block">“자네한테 작은 상자 하나를 줄 터이니 자물쇠를 잠근채로 간수했다가 내가 돌아오면 다시 열게나.”</p><p class="ql-block">“예, 꼭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p><p class="ql-block">“아마도 20년후쯤 될걸세.”</p><p class="ql-block">주지는 기력이 쇠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세상을 떠났다. 스승이 떠난 뒤 제자는 중회사의 새 주지가 되였고 스승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스승이 입적한지 20년이 되던 해, 수행원 몇을 거느린 약관(弱冠)의 젊은이가 중회사를 찾았다. 젊은이는 객당에 들기 바쁘게 20년전 자기를 보필했던 제자를 불러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p><p class="ql-block">"내가 자네 스승이오. 20년이 되였으니 이렇게 만나러 온 걸세.”</p><p class="ql-block">중승이 젊은이의 말을 도저히 믿어주질 않자 젊은이는 태연하게 물었다.</p><p class="ql-block">"내가 입적할 때 작은 상자 하나를 남겼는데, 그 상자를 열어본 적이 있소?"</p><p class="ql-block">지금 주지를 맡고 있는 제자가 스승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다고 하자 젊은이는 당장 그 상자를 열어도 괜찮다고 했다. 뭇 승려의 회의의 눈길이 쏠리자 젊은이는 힘주어 말했다.</p><p class="ql-block">"상자 맨 위에는 가사와 바리이고, 중간은 불경, 밑에는 보석일 터인데 모두 내가 직접 넣어둔 것이라네. 내 말이 맞으면 그 때의 스승이 돌아온 것이고, 틀리면 나를 절에서 쫓아내도 좋소."</p><p class="ql-block">상자를 열어보니 과연 한치 그름이 없었다. 스승이 돌아온 걸 확신하고 제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아뢰였다.</p><p class="ql-block">"스승님, 제자의 불경한 죄를 용서하십시오."</p><p class="ql-block">젊은이가 중회사에 며칠 머물렀다가 다시 먼 길을 떠나려 하자 중승은 못내 아쉬워하면서 언제 또 오시냐고 물었다.</p><p class="ql-block">"시간을 정할 수가 없구나. 떠나기 전에 편액을 하나 남기겠네. 편액을 보면 나를 보는 거나 마찬가질세."</p><p class="ql-block">스승은 붓을 휘둘러 “지원법계”라는 네 글자를 남기였고 그때부터 정전 처마밑에는 항상 그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p><p class="ql-block">진위를 가릴 수 없는 전설일 뿐이다.</p><p class="ql-block">정전을 뒤로하고 뜰을 나오니 돌담 밖 채마전에는 거두다 남은 무우 몇 포기가 드문드문 박혀있고 채마전 변두리에는 따스한 가을 해살을 받아 빨갛게 익어가는 꽈리와 무더기로 피여난 노란 산국(山菊)이 주역노릇을 하고 있다.</p><p class="ql-block">거기서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거무스름한 기와에 덮혔던 하얀 눈이 처마타고 녹아내려 락수물로 떨어지고 높은 곳으로 시선을 바꾸니 맞은 편 산자락에 빼곡하게 우거진 락엽송이 끝머리서부터 황금빛을 띄기 시작했다.&nbsp;</p><p class="ql-block">사찰은 숲에 묻혀 적료하고 숲은 그 속에 사찰이 있어 생기가 든다.</p><p class="ql-block">명나라 가정(嘉靖)년간에 한림원 찬수(撰修)를 지냈던 공용경(龚用卿)은 왜 그의 시에서 관록을 다 버리고 여기서 살고 싶다고 토로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p><p class="ql-block">절은 멀고 승려는 적은데 수림속 풀숲길 깊기만 하여라/돌계단이 벼랑에 감기고 대전이 구름우에 떴구나/빼곡한 나무가지 개울을 만나는데 구석진 바위는 해를 봐도 어둑진다/벼슬따위 소탈히 내려놓고 좌선하며 마음 다스리리(远寺山僧少,丛林草径深。悬崖盘石磴,古殿度云岑。枝密回溪合,岩幽向日阴。欲将金印解,潇洒定禅心。)</p><p class="ql-block">계절은 부르지 않아도 올 때를 알고 시키지 않아도 갈 때를 안다. 바야흐로 가을이 익어간다. 가을은 짙은 색의 잎으로, 잘 영근 열매로 완숙해가고 있다.</p><p class="ql-block">그냥 누렇게 물들어가는 락엽송 숲이 좋고 사찰의 검박한 운치가 포근해서, 그저 추녀끝의 은은한 풍경소리가 정겹고 오래묵은 측백의 그윽한 향에 취하고 싶어서 이 곳을 찾았을 뿐인데 가을 산을 오르내리는 사이 어느덧 차갑게 닫혔던 마음도 부드럽게 열리고 무아지경의 돈오(顿悟)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지는 느낌은 말로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 기꺼웁다.</p><p class="ql-block">수행은 출가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종교를 떠나 속세의 우리들 삶 자체가 수행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고즈넉한 곳을 찾아 산행하면서 잠시나마 과거와 미래를 잘라내고 지금 하늘과 땅사이에 있는 “본래의 나” 를 찾아 평온하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스런 일인가.</p><p class="ql-block">헛된 욕심에 기분이 울적해지고 완숙한 가을의 숲이 그리워지면 어둑한 내심을 비추는 밝은 등잔, 메마른 마음을 적시는 맑은 샘이 되여주는, 발로 걷는 산행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그런 산행을 다시 하고 싶다.</p><p class="ql-block">산과 산 사이로 엿보이는 뜬 구름 바쁜 걸음 잡아놓고 가을주 한잔 하고 싶어진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