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ql-block">本文刊于《长白山》文学双月刊2023年第2期</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 style="color: rgb(255, 138, 0); font-size: 22px;">중회사, 가을로 익어가다</b><b style="font-size: 22px;"> (상)</b></p><p class="ql-block">김성철 / 기행수필</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중회사(中会寺)로 오르는 숲길은 늘 고마웠다. 어수선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p><p class="ql-block">어제는 종일토록 진눈깨비가 추적거리더니 산행하기로 스케줄을 잡아둔 오늘은 아침부터 해빛으로 가득했다. 가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쾌청한 날씨다. 무서리에 한풀 꺾인 길섶의 들풀우에 엷게 쌓였던 설핏한 눈이 녹아내리고 투명하게 깨끗한 개울물이 왼편 골짜기를 타고 시원스레 달린다. 눈이 많이 온 탓에 물의 량이 많아지면서 오늘따라 물소리가 괜히 호들갑스럽다.</p><p class="ql-block">골짝따라 지세가 낮은 자락을 차지한 활엽수는 벌써 나무잎을 태반이나 떨어내고 맨 나중에 돋아난 우듬지쪽 이파리 몇점만 부둥키고 있다.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나무들 사이 진홍으로 변신한 티피나옻나무, 단풍나무가 유난히 돋보인다. 나무와 얼키설키 뒤엉킨 머루덩쿨에는 수분이 다 빠져 쭈크러진 머루송이가 가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공중에서 대롱거린다.</p><p class="ql-block">숲속 산길 저쯤에는 산책 나온 듯한 펑퍼진 승복차림의 스님 서넛이 사원으로 향하는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자연스레 고달프고 치렬한 수행의 길을 떠올리게 한다.</p><p class="ql-block">어제 갑작스럽게 쏟아진 첫눈도, 모처럼 가슴 설레이게 하는 가을도 그저 고맙고 고맙다. 눈에 씻겨 먼지 한 점 없는 숲이 뿜어내는 촉촉하고 으늑한 초목향에 감싸여 온몸으로 숨구멍을 잔뜩 열고 깊숙한 호흡을 한껏 누린다. 이곳 산과 수풀, 그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자연이 주는 값진 선물이다.</p><p class="ql-block">내처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한참 오르다 보면 오른편 멀지 않은 산꼭대기에 세워진 흰색의 벽돌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탑의 생김새가 병을 닮았다하여 정병봉(净瓶峰)으로 불리운다. 정병은 인도에서 승려가 려행을 할 때 밥그릇이나 의복과 함께 메고 다녔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불교 의례에 사용하였던 것이나 나중에는 일상용으로도 확대되여 맑은 물을 담기 위해 사용되였다고 한다. 탑 숲까지 가는 내내 정병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면서 일보일보 가까이 다가온다.</p><p class="ql-block">작은 탑 숲을 지나면 사찰 턱밑에 자리잡은 마애(摩崖)석각을 만날 수 있다. 견고한 화강암에 십여 년에 걸쳐 조각한 백여의 불상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정교한 조각상을 마주하니 경이로움과 숙연함이 동시에 느껴진다.</p><p class="ql-block">이른봄에 눈만치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우던 오래묵은 돌배나무 몇 그루가 마애바위에 둘러싸인 너른 공터에 굳건히 버티고 있다. 문실문실 뻗은 나무가지에는 떨어지고 남은 거뭇한 돌배가 드문드문 외롭게 매달려 있다. 때가 되면 어차피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무슨 미련때문에 아직 못 떠나고 있는 걸가.</p><p class="ql-block">돌배나무 남쪽의 작은 돌다리를 건느고 계단을 톺아오르니 중회사가 지척이다. 사찰입구에 발을 들여놓자 패루(牌楼)모양의 산문이 조용히 반긴다. 산문 꼭대기에 비가림으로 올려놓은 청기와 우로는 전성기를 맞아 흐드러지게 피여난 들국화가 노랗게 드리워져 있다. 매년 이맘때쯤 되여서야 볼 수 있는 산문의 가을단장은 지극히 화려하다. 그 뒤켠에는 상례송(尚礼松)이란 이름을 가진 3백년 묵은 소나무가 널찍한 광장을 꿋꿋이 지키고 있다.</p><p class="ql-block">광장 서쪽에는 나이 지긋한 어떤 사내가 술 달린 창을 다스리며 조예 깊은 무술을 뽐내고 있었고 사내를 외삼촌이라고 부르는 젊은 녀성이 남친과 함께 드론을 띄워 무술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때로는 원근을 조절하고 때로는 고도를 컨트롤하다가 기어이 드론이 나무가지에 걸려 간신히 빼내는 소동까지 벌이면서 십수 차례의 반복을 거쳐서야 촬영이 완성되였다. 소림사 무술의 이미지 때문일가, 아무래도 무예는 역시 절을 배경으로 다루어야 제격인 것 같다.</p><p class="ql-block">광장 남서쪽 비탈을 정비한 너른 터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비로보전(毗卢宝殿)이 우뚝하다. 중회사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일 터이다. 건물에는 구리로 주조하고 금을 입혀 만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천불상을 모셨는데 그 높이는 무려 12메터, 무게는 13톤이 넘는다고 한다.</p><p class="ql-block">비로보전같은 신축한 건물이 있는가 하면 적이 오랜 건물들도 많이 보존되여 있다. 당나라때부터 있었던 중회사는 화재 원인으로 수 차례의 재건을 걸쳐 현재의 명나라 풍 건물들로 재탄생한 것이라고 한다.</p><p class="ql-block">북서쪽으로는 산세를 따라 계단식으로 건물을 지었는데 맨 앞줄 중앙은 천지루(天地楼)이고 그 량켠은 솟을대문 모양의 문이 각각 하나씩 있다. 웬만한 절에서는 빠질 수 없는 종루(钟楼)와 고루(鼓楼)가 두 문과 나란히 하고 있다. 그 중에서 천지루는 천산(千山) 전역에서 유일무이한 무전식(庑殿式) 건축양식으로서 희귀성을 가진 보기 드문 건물이다.</p><p class="ql-block">천지루 뒤쪽으로 은은한 나무향을 뿜는 우람한 거목 한 그루가 사찰 정원을 반쯤 가리우고 있다. 5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측백나무이다. 허구한 세월의 풍상을 대변하는 거친 껍질와 그 우에 잔뜩 끼여있는 파란 이끼는 우거진 가지에 차분히 가려졌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 하나는 어느 해인가 내린 큰 눈에 짓 눌려 제법 많이 갈라져서 속살을 드러낸채로 밑으로 처져있다. 수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 측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가지는 작은 솔방울로 주렁지고 바늘잎은 많이 싱싱했다. 이름이 알고 싶어지는 파아란 산새가 나무가지 사이에서 포르륵거린다. 고목은 회춘이라도 한 듯 생기로 가득했다.</p><p class="ql-block">하오의 해빛이 떨어져 뜰안은 포근하다. 장경루(藏经楼) 처마밑에서 한 스님이 가부좌를 겯고 단전 밑에 두손을 편히 포갠 자세로 좌선에 잠겼다. 다스한 해살과 청량한 바람은 인간의 때묻은 육신도 번잡한 생각도 몽땅 씻어내릴 것만 같다.</p><p class="ql-block">고목 뒤켠의 돌계단을 열개쯤 디디면 관음전이 나타난다. 깨끔한 관음전 뜰안의 나즈막한 벽돌담 밑으로 살비아와 백일홍, 그리고 월계화, 미인초, 만수국까지 다양한 꽃들이 무서리에 싱싱함이 많이 빠졌지만 검소한 사원을 장식함에는 제법 넉넉하고 있었다.</p><p class="ql-block">(하편에서 이음)</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