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화인들과 함께

微风

<p class="ql-block"><b style="text-align:left; color:rgb(57, 181, 74);">---중조합작영화 "력도산의 비밀"을 촬영하면서</b></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237, 35, 8);">박준희</b></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영화감독 박준희 </b></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중조제작팀일동 조선묘향산 촬영현장에서</b></p><p class="ql-block"> 중조첫합작영화《력도산의비밀》이 마침내 완성되여 국가영화국의 최종심사에 통과 되였다. 작년(2004년)7월 4일 평양에서최후로 협의에 싸인한후 오늘까지 전반시일이 1년남짓이 걸린셈이다.</p><p class="ql-block"> 일년이 넘는 준비와 제작행정에서 벌어진 일도 많았고 고생도 무수히 치렀다. 조선과 영화합작을 했다니 이것저것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뭔가 알고 싶어한다. 나도 그들의내면에 엎드려 있는 호기심을 안다. 왜냐하면 조선이란 나라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동안 몽롱한 존재처럼 늘 신비하게만 여겨져왔으니까. </p><p class="ql-block">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나는 어렸을 때 조선의 회령군과 두만강을 사이두고 이쪽 삼합이라는 곳에서 살았고 지금까지 대부분 시일 조선과 가까운 연변을 떠난적이 없기에 손을 내밀면 만지울 것같은 조선이 그렇게 신비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p><p class="ql-block"> 사실 우리는 어린시절에 조선영화를 보고 조선의 노래를 부르며 자랐었다. 우리가 금방평양에 도착해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김무전총장과 홍영희, 김정화, 최창수, 서경섭, 김윤홍 등 명배우들과 자리를 같이한 석상에서 장춘영화촬영소대표단단장 송강파감독은 &lt;우리는조선영화를 보면서 자랐고 조선영화를 보면서배웠다&gt;고 했다. 송감독과 동갑인 나는 그 말의 뜻을 너무도 잘 안다. 그때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들이 많이 들어왔었다. </p><p class="ql-block"> 쏘련,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베트남, 로므니아, 조선의 영화들이 들어 왔었는데 조선의 영화가 제일 많았다. </p><p class="ql-block"> 오랜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영화이름들이 기억에 생생하다.</p><p class="ql-block"> &lt;전우&gt;, &lt;정찰병&gt;, &lt;금희와 은희의운명&gt;, &lt;꽃파는 처녀&gt;, &lt;묘향산에서 다시 만나다&gt;, &lt;이름없는영웅들&gt;, &lt;로동가정&gt;, &lt;남강마을의녀성들&gt;, &lt;꽃피는마을&gt;, &lt;사과딸 때&gt;, &lt;보이지 않는 전선&gt;, &lt;기관사의아들&gt;, &lt;금강산. 처녀&gt;, &lt;압연공&gt;, &lt;영원한 전사&gt;......어쨋든 그 시절 조선영화가 중국사람들의 생활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p><p class="ql-block"> 나는 평양에 가서야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장장 10여년간 조선영화의 부흥시대를 김정일장군이 수많은영화인들을 데리고 창조했다는 것을 알았다.</p> <p class="ql-block"> 영화촬영이 마무리돼가고 있는 이때 지난 1년을 돌이켜보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p><p class="ql-block"> 두나라 영화인들은 문화나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결국엔 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했다. 어떤 때는 사실 어려웠다. </p><p class="ql-block"> 내가 어려운 위치에 처했던 것은 언어나 민족 등 원인으로 합작제작팀의 전반 성원가운데서 위치가 특수했던 탓이였다. </p><p class="ql-block"> 쌍방을 료해하고 리해할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보니 쌍방은 무조건 나한테 의뢰해 왔고 그러다가 일이 잘 안돼도 자연히 나한테 불만스러워 하였다. </p><p class="ql-block"> 나는 시종 모순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시집살이 신세라할가? 그러나 내 신분이 그러니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쌍방이 의견상이로 언쟁을 벌릴 때 나는 바보가 될수 밖에 없었다. </p><p class="ql-block"> 쌍방의 리익을 꼭같게 수호해야 하는 사람이 나뿐이였던 까닭에 두 측의 진실한 의사소통에 부심해야 했고 또 량측을 설득하느라 안간힘을 다 빼야 했다. </p><p class="ql-block"> 만약 나까지 중간에서 바보되기를 거부하고 갑자기 총명해져서 파괴적인 언쟁에 열을 올렸더라면 합작이 열번도 파렬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바보 노릇을 하는 와 중에 재미있는 일들도 많이 생겼다. 그 과정에 나는 우리측은 물론 조선의 영화인들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리해를 가지게 되였고 그들도 나를 리해하고 고마워 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번 기획부터 문학편집이고 집행감독이고 가사 쓰는데까지 사심이 없이 닥치는 대로 했다. 내 목적은 두 나라의 첫합작이 나의 손에서 좌절되여 합작의 문이 닫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두 나라 영화인들 사이의 갈등을 푸는데 땀동이를 흘려가며 영화를 만들다보니 나는 영화촬영자체이외의 다른 수확도 겸득하게 된것이였다. 나는 극히 어려우면서도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그 나날들을 나의 짧은 인생의 더없이 소중한 경력으로 간주한다.</p><p class="ql-block"> 이번 합작을 통해 중조두나라영화인들은 서로를 리해하지 못하던데로부터 깊이 리해하게 되였고 두터운 정을 쌓았다. 다른 민족사이에, 지어 같은 민족사이라해도 문화차이의 곬이 깊으면 잠시 어울리기가 어려울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에 가서 화합할수 있는 원인이 바로 우리에게는 인간이란 동질성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정이오르면서 서로간의 리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57, 181, 74);"> 장춘영화대표단이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첫 방문할 시 조선의 유명배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b></p><p class="ql-block"><b style="color:rgb(57, 181, 74);"> (첫 줄 오른 쪽 첫번째 홍명희, 두번째 줄 오른 쪽 세번째 박준희감독) </b></p> <p class="ql-block"> 내가 2003년에 중국인민해방군군가의작곡자인 조선족음악가--정률성의 생애를 다룬 영화 &lt;태양을 따라서&gt;를 완성한 그 해년말부터 조선영화회사와의 접촉이 약속돼왔고 이듬해 양력설이 지나서도 계속 합작의향을 교류하여 왔었다. 장춘영화그룹의 부총재로 있는 친구 송강파감독의 시원한응답과 초청으로 결국 이듬해 5월10일에 조선영화회사사장최영일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부총장리경진 등 3명이 장춘을 방문하였다. 합작협의는 재빨리 이루어졌고 조선에서 제공한 9편의 시나리오중에서 &lt;백합이라는그녀&gt;라고 제목한, 력도산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소재를 다룬 제재를 선정하였다. 후에 중국측의 의견으로이름을 &lt;력도산의비밀&gt; (상영할 때는 또 &lt;두 손의 비밀&gt;)로 바꿨고 중어로는 &lt;동방각두사&gt;로 했다. 중국에서 력도산이라면 일반에 알려지지 않고 있기때문이였다. 조선에서는 이전에 주문합작건으로 이딸리아와 로씨아와 합작을 해보았을 뿐 중국과는 이번 합작이 처음이였다. &lt;피로 맺어진형제&gt;로 수십년을 지내 온 두 나라사이에 영화합작이 한번도 없었다는걸 우리는 그제야 알고 저으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력도산제재로 조선국내에서 15부작드라마를 찍었고또 영화를 찍으려고중국과의 합작을 8년전부터. 시도하였는데 성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것도 알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lt;무심결에 심은 버들이 숲을 이룬다&gt; 는격으로 내가그만 중조영화합작력사에 첫 기록을 남기는셈이였다. </p><p class="ql-block"> 7월 1일에 장춘영화대표단송강파, 우견,왕경용(북경영화투자회사총재)과 나까지 4명이 조선영화회사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했고 4일에 평양에서 최후로 합작협의서에 싸인을 하였다. </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57, 181, 74);"> 조선예술영화접대실에서 조선영화문학작가 류부연, 연출가 리주호와 함께 시나리오를 토론하는 박준희 감독 (가운데 사람) </b></p><p class="ql-block"> 류부연은 조선중앙백두산창작집단영화문학창작사의 유명한 작가이다. 다부작영화문학 <민족과운명> 중의 &lt;허정순편>,<귀화한 일본인 녀성편> 등을 창작하여 인민들 속에 널리 알려진 재능 있는 녀류작가이다. 그는 주로 녀 주인공들을 형상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p><p class="ql-block"> <잊지 못할 전우>, <설한령의 세 처녀>,<효녀>,<봄을 안고 사는 처녀들> 등 많은 작품을 썼다. </p><p class="ql-block"> 그러던 그가 력도산과 같은 사나이의 작품을 취급하는데서도. 재질이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그는 근 30년 동안 30여편의작품을 창작하여 나라의 영화예술발전에 이바지하는 나날에 당당한 일류급작가로 되였다. </p><p class="ql-block"> 류부연은 김일성종합대학졸업생으로서문학에 대한 애착이 도를 넘을 정도였다. 암에 걸린 남편을 곁에 두고도 필을 멈추지 못했던 그는 고인에 대한 미안과 그리움으로눈물을 흘리군 한다. </p><p class="ql-block"> 하지만 정작만나고 보니 강직한 녀인의겉모습에 나타나는 유연함과 소박성, 누나와같은 부드러움에 어데서 그런 정열과 완강성이 용솟음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그녀였다. </p><p class="ql-block"> 조선녀성들의 외유내강의 성격이 문학지성인으로서의 그녀한테서 너무도 완벽하게 구현되는 것이였다.</p><p class="ql-block"> 리주호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중견감독이다. 그는 조선영화대학에서 연출가학부석사를 졸업하고 80년대중반에 구 쏘련모스크바영화대학감독학부박사까지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유명한 작가로서 김일성수상과 김정일장군의 사랑을 내내 받아오던 분이라고 한다. 리연출가가 정녕 국내에서 소문 놓기는 &lt;우물집녀인&gt; 이란 영화에서 남(한국)에서 건너온 한 녀인이 수년간의 오해와 불신임속에서 고난을 겪다가 해빛을 보는 제재를 대담하게 다룬데서였다. 그 만큼그는 영화에 대단히 집념했고 남다른 독창적 사유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빨리 접수하고 머리속에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튀여나오는 그런 형의 연출가였다. 지금도 눈을감으면 그가 피곤도 잊고 추운새벽까지 촬영을 진행하면서 배우의 연기에 도취되여 &lt;카트&gt;도 잊고 멍해 있던 모습이라든가 &lt;카트&gt; 를 웨치곤 제 흥분에 저도 모르게 펄쩍펄쩍 뜀질하는 순수하고 천진하기까지 해보이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중조촬영팀이 합작협의서에 싸인하는 장면 </b></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 (박준희감독 오른 쪽 첫 사람) </b></p><p class="ql-block"> 최영일사장은 자기를 잊고 일을 하는 사업가이다. 중임을 떠멘 사람으로서의 인내성과 완강한 성격의 소유자, 심장병으로 인해 몇번씩 까물어쳐가면서도 물러설줄 모르는 그에게서 조선의 정신을 보아낼수 있다. 전업 예술인이 아니지만 어릴때부터 문학을애착하고 력도산을 찍으려고 10년이란 시간을 전전긍긍하며 력도산시나리오의 수개토론에 다 참여하다보니. 전업일군이 다돼 버린 그였다. </p><p class="ql-block"> 나는 그가 한낱 지도일군이기보다 시나리오 토론을 할때면 그가 전업예술인으로 착각하군 하였다. </p><p class="ql-block"> 후에 당에서 그를 영화대학에 보내학습을시켰다. 제작과정에 크고 작은 일로 우리와자주옥신각신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정이더 가는게 그였다. </p><p class="ql-block"> 조선이 중국과 다르다면 예술부문에 당일군들도 전업을 전공 한사람으로 발탁시킨다. </p><p class="ql-block"> 최영일은 이번 영화를 찍기위해 숱한 어려움과 재정난을 겪었다. 나 역시 여러가지피치못할 사정으로 마음과 말뿐이였지 그들의 어려움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 </p><p class="ql-block"> 지금도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중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곤난이 있을 때 왜상급에 손을 내밀지 않았었는가고 그에게 물었었다. 그러면 그는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우리모두가 손을 내밀면 장군님께서 또 어떻게 하시겠는가&gt;고 한다.</p><p class="ql-block"> 조선에 &lt;혁명적의리&gt;란 말이 있다. 김일성장군의 명언이며 체계가 잡힌 혁명도덕리론이였다.</p><p class="ql-block"> 아마 맑스레닌주의를 숭상하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는 없는 말이다. 조선이란 특정된 나라와 조선사람이란 특정된 민족만이 이런 리론을 창출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의리란 개념은. 주체사상의 도덕바탕이 된다. 이런 리념으로 민중이 단결되여 있다. </p><p class="ql-block"> 김일성주석이 자기의 생명의 은인인 중국인 장울화의 후손을 친 자식보다 더 사랑해주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보면 이것이 리해된다. 김일성주석이 혁명유가족, 나라인재들과 왕이라 불러주는 아동들과의 감동적인일화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p><p class="ql-block"> 김정일장군도 그 넋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새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다. 김정일장군이중앙당비서에 처음 나서며 책임진부문의 하나가 영화와 예술이였다. 그때 나이가 28세라고 조선의영화인들은 말하고 있다. 지금도 촬영소내 작은 초대소에 그의 방이 그대로 보존되여 있고 정문에 들어서는 벽 정면에 그의 그 시절 찍은 사진이 걸려있는데 젊고 씩씩한 미남이다. </p><p class="ql-block"> 영화시나리오부터 감독, 촬영, 미술, 음악,분장, 배우의 연기에까지 손길이 갔고 그러는 가운데 &lt;꽃파는처녀&gt; 와 같은 명작과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나왔다. 세인들은 김정일장군이 영화에 커다란 애착이 있고 다른 예술도 즐긴다는걸 다 안다. </p><p class="ql-block"> 하지만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그걸믿는지는 잘 알수 없다. 어느나라의 정치인이나지도자들이 예술을 안다고 하면 고작해야 흉내를 내고 그걸 밑천으로 세상사람들의호감을 사자는거라고 생각한다. 전업적일수가 없다. 전혀 다른 분야이고 그럴시간이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김정일장군은 탄복하지않을수 없는 예지와 전업적자질로 영화인들을 거느리고 60-70년대의 조선예술의 고봉에 올라섰고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p><p class="ql-block"> &lt;꽃파는 처녀&gt;가 체코국제영화제에서 특등이란 종내로 설치한 적이 없었던 상을탄것이 바로 증거의 하나이다.</p><p class="ql-block"> 조선사람만이 소유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특수한 애착과 자질이 사회주의란 특정된 환경에서 김정일장군의 신상에서 자연히통일된 것이다. 오직 이 땅에서만이 존재할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p><p class="ql-block"> 이런 혁명의의리로 상하가 뭉쳐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 없다.</p><p class="ql-block"> 나는 지금 최사장이 우리를 안내하여 금수산 김일성기념당에 갔을 때 그가 그렇게까지 흐느끼며 울던 정경을 눈앞에 떠올리며 주체사상이 이들의 생활과 사업의 구석구석에까지 슴배여 있게 된 리치를 혁명적의리란 리론에 결부시켜 본다.</p><p class="ql-block"> 최사장은 이 영화가 완성에 가까울 때 하루는 섭섭한 인상으로 이 영화의 탄생을 위해 노고를 쏟은 전임 책임간부들과 예술인들을 외우며 그들의 이름을 이 영화에 박지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것을 마음으로리해할수 있었다. </p> <p class="ql-block"><b style="color:rgb(57, 181, 74);"> 최영일사장이 중국팀을 안내하여 개선문을 참관하였다. </b></p><p class="ql-block"><b style="color:rgb(57, 181, 74);"> (오른 쪽 일곱번째 최영일사장, 오른 쪽 첫번째 박준희감독) </b></p><p class="ql-block"> 40대이상 년령의 중국사람들에겐 &lt;꽃파는처녀&gt;의 꽃분이역 홍영희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조각된 존재였다. 신화같은인물이였다.</p><p class="ql-block"> &lt;꽃파는처녀&gt;는 온 중국의 남녀로소가 눈물의 바다를 이루게 하였고 그 거대한 영향력이 생활속에까지 미쳤다.</p><p class="ql-block"> 한쌍의 청년남녀가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처녀는 주인공의 운명에 하염없이 우는데 총각이 운다고 비웃었다.</p><p class="ql-block"> "영화란 그림자인데 울긴?"</p><p class="ql-block"> 처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각과 관계를 끊었다. 감정이 조금치도 없는 남자와 한평생 같이 살수 없었다.</p><p class="ql-block"> 그때 이런 이야기가 많았다. 요즘 중국의70년대초의 생활을 다룬 영화 &lt;공작새&gt;에서 조선민요 &lt;도라지&gt;부터 조선영화음악이전반배경음악으로 들린다.</p><p class="ql-block"> 강문이 재작한 영화 &lt;해빛찬란한 나날에&gt;는 &lt;김일성장군의노래&gt; 합창곡이 완정하게불린다. </p><p class="ql-block"> 그때 중국의 생활이 조선영화의 영향을받은 정도를 실감할수있다. </p><p class="ql-block"> 지금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조선노래에 익숙하다 노래 몇곡쯤을 부를줄 아는 것은례상사다.</p><p class="ql-block"> 리계민감독이 조선에서 &lt;김일성장군의노래&gt;를 조선어로 한 구절도 틀림없이 불러사람들을 놀래웠다.</p><p class="ql-block"> 내가 처음에 협의로 조선에 갔을 때 나는이름을 짚어 홍영희 등 몇명배우를만나고 싶다고 했다. </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홍영희의 영화 한 장면</b></p><p class="ql-block"> 그리하여 홍영희와 최창수, 김정화, 리영호(홍길동역), 김윤홍, 서경섭 등을 만날수있었다. 순간 마치 어릴 때로 되돌아 간 심정이였다. 내가 또 우리가 찍는 영화에 젊은이들을 주역으로 등장시키고 이름있는 인민배우들로 그들을 보좌할 것을 제기하였더니 배우출신의 김총장이 하는 말이 조선에서도 이 많은 인민배우들이 한 영화에 출현한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무난히 접수하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우리제작팀이 평양에 도착하여 두나라 예술인들이 모였을 때 우리팀성원들은 앞다투어 홍영희와 사진을 찍었다. 촬영소에 들어서면 오른편 기념관벽에 백평방남짓한 천연색옥돌로 다듬어 만든 영화성과를 구사한 벽화가 있다. 거기에 홍영희의 생동한 모습이 박혀있다. 그러한 명배우임에도 그는 여전히 보통 사람처럼 소박하였고 나이도 인제 지긋했지만 첫인상이 여전했고 화면감도 좋았다. </p><p class="ql-block"> 성격은 전형적인 우리조선녀성으로 가슴이 애틋할 정도로 돋보였다. 연기할 때도꼼꼼하고 진지했고 전혀 명배우의 틀거지란찾아볼수 없었다. 몇안되는 장면이지만 불평하나 없이 다른 영화를 찍는 사이사이에오가며 찍었다. 수요될 때면 그를 불렀고 그 즉시로 그는 몇백리밖에서 차를 타고 달려오군 하였다. 물론 조직적인 기률의 요구에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종내로 자기를인민들보다 더 특수한 위치에 놓치 않았고그걸 수치로 여기는 것이였다. 어려서부터남을 위하고 자기를 잊는 그런 교육을 받았기에 그들은 그걸 응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p><p class="ql-block"> 묘하게도 전반 영화촬영의 첫장면과 맺음장면은 모두 홍영희의 커트로 끝냈다. 사실우연이였다. 물론 어떠한 필연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p><p class="ql-block"> 내가 마지막장면을 끝내고 그와 갈라지면서 차에서 그를 잊지 못하는 중국관중들에게 드릴말 한마디 부탁했더니 그는 연하나 밝게 웃으면서 &lt;중국관중들에게감사를드리며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gt;고 하였다. 홍영희는 그처럼 영원히 선량한 마음과 부드러움을 지닌 진정한 조선녀성이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김정화는 조선에서 무조건 1위에 꼽는 녀배우이다. 나이. 50인 지금도 그는 자기의 세련된 연기로. 사람들을 감탄시킨다.</p><p class="ql-block"> &lt;이름없는영웅&gt; 에서 녀주역김순희중위로 출연한 그는. 이쁘고. 강의한 매력으로 세상을 정복하였다. </p><p class="ql-block"> 생활에서는 반면에 안온하고 말수가 적으며 세련된 스타일이다. 사업할 때나 식탁에서나 고요한 호수처럼 아늑하면서도 말한마디에 고운 파문을. 일으키며 대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수 있는 류형이다. 그래서 온 나라 상하에 가장 위망이 있는 녀배우였다. </p><p class="ql-block"> 한번은 오후부터 촬영을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5시까지 찍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굉장히 추웠고 끼니까지 건너는 상황이였다. 배우를 세워놓고 조명을 맞춰야했다. </p><p class="ql-block"> 우리는 엷은 기모노차림의 김정화를 아껴 미술조의 일군으로 대신하려 하였다. 이때 김정화는 조용하게 그렇게 되면 얼굴 형태나 색상이 같지 않아 조명사들의 인물부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서 추워도 참을수 있으니 자기가 그냥 하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자리에 선채 까딱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조명사와 손을 맞추었다. 중국예술인들은 그러는 그녀에 대단히 감복했고 일단 그녀의 장면을 촬영한다하면 다들 성수나 하였다. 예술창조는 마음이 맞아야 되는 일이였다. </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영화에서의 김정화의 연기 장면 </b></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 (오른 쪽 첫 사람) </b></p><p class="ql-block"> 귀국재일동포 김윤홍씨는 &lt;민족과운명&gt;에서 박정희대통령을 출연해 인기도가 매우 높았다. 조역으로 그것도 부정적역으로 반생을 지나온 그에게 나라에서 인민배우의 최고영예를 수여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혀없었던 일이다. </p><p class="ql-block"> 조선에서는 이와같이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김윤홍의 영화장면</b></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 1, 1);"> 조선영화를 섭렵해보면 우리가 한두마디로 이렇다저렇다 판단하기 어려운 무언가가있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 1, 1);"> 조선영화라하면 어떤이들은 너무 사회주의식이여서 다양성이 없고 예술보다 정치</span>를더 중요시하며 정부적 차원으로 제압한다고한다. </p><p class="ql-block">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해보면 그렇치않다. 다양한 여러가지 형식의 제재들도 있다.인물성격부각에서도 설교적이 아니라 예술의 세부와 충분한 이야기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한다. </p><p class="ql-block"> 력도산을 례로들면 그는 조선에서는 손색없는 민족영웅이다. 그가 생전에 술과 녀색을 즐기고 살아서 자기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공개장소에서. 언급한적이 없다는 사실도 그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력도산이 처한 환경과 심리를 충분히 리해하며 조선인으로서 세상을 놀래웠다는데서만도 자부감을 가진다. </p><p class="ql-block"> 김일성주석 한테 승용차한대를 증정했다하여 그럴것이라고 할일이 아니다. 홍석중의 &lt;황진이&gt;에 육담도 있고 성적묘사도 많지만 그들은 출판하였다. </p><p class="ql-block"> 뭘 설명하는가? 그들은 자체의 예술과 심미표준이 명확하게 있고 그걸 견지한다. 그것이 김일성주석과 그 사상을 이은 김정일장군의 주체예술론이다. </p><p class="ql-block"> 그들은 사회에 도덕적인 나쁜영향을 끼치는건 견결히 거부한다. 후대들의 양성에후환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건설하려는 리상사회의도덕관과 어긋나기때문이다. 그들은 예술이 아름다움(사상, 마음, 행위 등)을 표현하기 바라며 또 내용에 맞게 형식과 표현을 자유로하기 바란다. 그러나 내용에 맞지않게 억지로 집어넣는 표현은 거부한다. </p><p class="ql-block"> 전쟁장면에 분화장을 하고 발레배우에게솜신을 신기는 식을 반대할뿐이다. 그렇다해서 다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예술가들이 리해력차이나 자질차이로 높은 요구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정에 필경존재하게 되는 문제이다. 어느나라에 나 다있는 일이다. 조선에도 국내교양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는 자국실정에 따라만들수 밖에 없다. 이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기실미국영화의 대부분도미국정신을선양한것이다.조선의현실태에서 그들이 주체사상으로자기의 민족예술을 지켜가는것이 리해되지못할일이 결코 아니다. 이를 그곳에 가서 상당기일 체험해 보면 바로 알수 있다. 김윤홍은 롱담도 잘 하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그가 연기를 할 때면 어찌나 세밀하게 하고 분위기를 돋구는지 온몸이 극덩어리이다. 영화를 볼때보다 그가 연기하는것을 흔상하는것이 썩 더 감명스럽다. 그의 모든연기의 매력을 촬영기가 포착하기 어렵기때문이다. 그가 무대에서 연기하라면 더 멋있게 연기할것이라고 생각한다. </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제1주역김성수</b></p><p class="ql-block">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김총장은 김성수는력도산역을 하기 위해 태여난 사람이라고 형상적으로 말했다. 키나 생김새나 체중까지도 원형과 비슷하다. </p><p class="ql-block"> 프로레슬링을 어려서 하다가 영화대학을다니고 배우로 되였다. 땅크라고 불리는그는 지금1급배우이다. </p><p class="ql-block"> 프로레슬링장면을 연기할 때 대신역이 없이 전반경기장면을 자체로 해냈다. 매일 기상할 때 겨우 기여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평양체육단에서 데려온 상대역을 감당한 운동원들이 촬영중 갈비대가 부서져나가면 다른운동원을 바꿔들이 댔다. 둘이나 갈비가 나갔지만 그 당시 나는 몰랐다. 그들은 상하게되면 아무말없이 조용히 현장에서 퇴장했기때문이였다. 어떤 때는 촬영이 긴장하여 때시걱을 지날 때가 많다. 김성수는 큰 체질에배고파 식은 땀을 줄줄 흘리지만 끝까지 견지한다. 그는 이번 촬영에서 자기의 중요한위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촬영소에서는 촬영기간 그에게 두 사람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촬영현장</b></p><p class="ql-block"> 이 사진을 보니 웃음이 저절로 난다. 이는두 나라영화인들이 촬영현장에서 예술처리방식에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는 장면이다. </p><p class="ql-block"> 내가 사이에 끼여 뭔가 해석하며 말린다.이럴 때가 종종 있었다. 예술인은 양보가 없다. 그래도 다투고 나면 속구석에 그늘은 지지 않는다. 사업상의 다툼이 감정을 상하게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p><p class="ql-block"> 우리중국측의 예술지도 리계민은 성격이급하여 어떤 땐 사람의 기를 채워준다. 하여주위 사람들의 미움깨도 많이 샀다. 조선측뿐이 아니라 중국팀내에서도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지내보면 마음씨는 착하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는 그가 로인임에도 사랑스럽다고 놀려 주군 하였다. 중조 두 리씨(중국의리계민과조선의리주호)가 합작과정에 얼마나 고집을 피우며 다퉜는지 모른다.서로 미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예술인들이 중국에 왔다가 대련역을 통해 돌아갈 때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p><p class="ql-block"> 중국측 리씨가 섭섭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그들이 차에 오른다음 집뒤모퉁이에 숨어서 눈물을 훔쳤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렬차가 떠나면서 굽인돌이를 지나다보니 조선예술인들이 그정경을 목격했던것이다. 크게감동된 조선예술인들은 평양으로 돌아가는길에서 리계민의 이야기를 줄창 외웠다고 한다. 창작과정에 밉던 소행들이 이때는 강물에 떠나가듯이 가뭇없이 사라지더란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lt;싸움끝에 정이 든다&gt;고 했나보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점잖고 풍채가 좋은 김총장이 우리를 떠나 보내는 환송연회에서 허허 웃으며 롱담조로 우리와 이렇게 말하였다.</p><p class="ql-block"> “우리조선사람은 완강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있는데 중국사람들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p><p class="ql-block"> 끝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가사로 글을마감한다. 이 가사에는 력도산이 언제나고향을 잊지 못하고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간절한 념원을 담았다. 나는 간고한 촬영도중에 어느 하루 갑자기 령감이 떠올라 적었는데 후에 렴승학작곡가가 밤을 패며 곡을 지었다. </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1</p><p class="ql-block">한천월야(寒天月夜)에 기러기 운다</p><p class="ql-block">이 밤에 날 깨워 어데로 가자느냐</p><p class="ql-block">봄바람 불어 백학이 웃는 고장</p><p class="ql-block">어머니동구밖에서 밤 새워 기다린다</p><p class="ql-block">아---</p><p class="ql-block">청청창공에 기러기 운다</p><p class="ql-block">정다운고향가자 나를 부른다</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2</p><p class="ql-block">한천월야에 기러기 난다</p><p class="ql-block">서럽던 어젯날 네넋은 어데갔나 </p><p class="ql-block">바다가 백사장 애씨름 놀던 고장 </p><p class="ql-block">사나이 꿈속에도 잊지를 못하누나</p><p class="ql-block">아---</p><p class="ql-block">청청창공에 기러기난다 </p><p class="ql-block">어머니 고향찾아 이 마음 나래친다</p><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 (전문 끝) </p><p class="ql-block"># 아래사진들은 영화촬영시 부분적 사진들임</p> <p class="ql-block" style="text-align:center;"><b style="color:rgb(57, 181, 74);">녀 주역 유리 </b></p>

寒天

月夜